김범식소설가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온 사방에서 영혼으로 닥쳐오는 파도 소리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대양의 숨소리이다. 하얀 물꽃을 피우고 사라짐을 반복하는 파도는 꺼지지 않는 영원한 진리의 횃불처럼 보인다. 끝없는 무한의 생명, 영원히 지지 않는 생명의 불꽃 바로 그것이다.
모처럼 동해의 한 자락을 차지한 영덕의 한 구석진 해변으로 왔다.
오랜만에 야릇한 환경에 접한 내 코는 당황한 듯이 가끔 벌름거리면서 바다 특유의 이색적인 비릿한 내음과 인사를 한다. 이 야릇한 바다 내음, 어느 신비한 여인의 마르지 않는 깊은 생명에서 토해내는
싱싱한 아름다운 숨결보다 더 황홀한 것 같다.
멀리 수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그 너머에는 먼 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만이 무심한 채 자신과 지상의 바다를 가르고 있을 뿐이다. 좌우로 무한히 기다란 수평선이 함께할 수 없는 허공과 바다를 갈라놓고 있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인 것처럼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미움과 사랑이 서로 섞여 공존하는 것처럼 바다와 하늘은 혼합될 수는 없는 것일까.
저 수평선 너머, 저 아래에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일까.
거시적 망원경에서 미시적 망원경으로 바꾸어 시야를 앞으로 조금 당긴다. 햇빛을 머금고 일렁이는 윤슬을 응시한다.
뭔가의 거대한 무리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파도들이다. 그들은 성난 야생동물의 무리처럼 요동치면서 떼거리로 몰려온다. 굶주린 늑대의 무리가 먹잇감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바닷물을 먹으며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꿈틀거림이 하얀 물꽃을 피우면서 쉼 없이 해변으로 몰려오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달려오는 헤아릴 수 없는 파도의 흰 무리이다.
그들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자마자 꼬꾸라지면서 90도 아래로 처박히면서 가만히 있는 아랫물을 이유 없이 사납게 삼키면서 물밑으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또다시 무지막지한 생명의 대가리를 쳐들고 입을 다시 벌린다. 그러고는 다시 꼬꾸라지면서 같은 동족의 무리를 짓밟으며 육지로 가까이 다가간다. 마지막으로 온몸으로 무심한 해변의 바위를 이유 없이 때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 그러고는 드디어 그 물꽃들은 형체 없는 존재가 되어 바다에 흡수돼버린다. 하지만 계속해서 또 다른 물꽃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다.
파도는 휴식도 없고 잠도 없다. 밤이나 낮이나 변함없이 움직인다. 잠시라도 멈추면 마치 온 세상이 정지될 것 같다. 인간의 심장처럼 잠시 멈추면 죽게 되듯이 그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쉼 없이 물꽃을 피우고 있는 것일까.
마치 끝없는 몽골 평원에서 말을 타고 적들을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기병처럼 해변으로 닥쳐오고 있다. 육지는 금방이라도 파도의 무리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 같다. 마치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고, 불한당에게 달려드는 돈키호테처럼 정의의 기사도 같다.
금방이라도 나약하고 무지한 나를 덮치지는 않을까.
지식의 대양에서 모래알 하나 건지지 못한 잡초보다 못한 무지한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와서는 스르르 물러서고 만다. 마치 성난 사자가 얌전한 집토끼가 된 것 같다. 마치 오랜 전장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는 돈키호테의 뒷모습처럼 보인다.
짧은 순간이지만 태어났다가 죽고, 또다시 살아났다가 사라진다. 어쩌면 짧은 생명의 무한의 일생인 것 같다. 파도의 생명은 찰나인 것 같지만 쉼 없이 영속하는 존재의 생명인 것 같다. 파도의 물꽃 한 송이는 거대한 생명의 수많은 촉수 중 하나인 것 같기도 하다.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저 거대한 무리의 파도는 도대체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며, 존재하는 여기는 어디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모처럼 영덕 파도와의 만남은 서머싯 몸의 걸작 ‘달과 6펜스’가 생각나게 한다.
이 작품은화가 폴 고갱을 모티브로 했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강압적인 인습, 위선적인 도덕관, 체면 등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6펜스(현실)를 버리고 달(이상)을 찾아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들어가, 원주민과 함께하면서 대작을 완성한다.
우리는 폴 고갱의 명작 이름처럼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을 늘 잊지 말아야겠다.